과거 있는 오빠는 용서해도 비전 없는 오빠는 용서할 수 없다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 살다보면 그들의 삶의 방식과 생각이 우리와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품고 있는 생각은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삶과 행동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 중 특이한 것은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전망, 혹은 장래 소망을 이뤄내는 비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것이 항상 더 중요하고 그것을 취하면 그만이다. 조삼모사의 생각으로 살기 때문에 약간의 이익을 당장 취하는 것이 내일의 더 큰 이익과 발전보다 더 중요하다. 그래서 예금이나 적금을 든다던지 지금 월급을 적게 받더라도 향후 회사 발전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고 주식 배당을 약속받는 것으로는 그들을 마음을 얻지 못한다. 회사가 잘되면 너도 잘되고 회사와 함께 커나가자 라는 말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오늘의 유익에 더 몰두한다. 이런 현상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동일하다. 그래서 구원과 영생이 미래적이면 그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지금이 아닌 먼 미래의 번영과 축복이라면 별 감동이 없다. 현세의 유익, 기쁨, 행복, 평화에만 동기 부여가 되는 사람들이기에 기독교의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의 가치를 전하기가 쉽지 않다. 왜 그럴까? 베트남의 근대 역사는 외세의 침략과 약탈, 프랑스 식민시대, 국제전이 돼버린 베트남 전쟁, 중국과의 전쟁 등으로 안정될 날이 없었다. 국민들이 앞날을 소망하고 바라보고 그것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쌓아올리며 살아가는 평화시대가 거의 없었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나 빼앗기고 도륙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 당장 살아남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다. 미래적 약속과 기대는 지켜지지 않아 늘 허망했다. 소수민족들의 삶은 이보다 더 열악해서 다른 종족과의 분쟁, 주종족인 낑족으로 부터의 핍박 등으로 늘 고단했다. 오늘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의 치열함 속에서 미래의 약속을 믿을 수 없었고, 그런 삶의 패턴이 오랜 기간 반복돼서 오늘이란 시간에 더 집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금의 힘이라도 손에 쥐고 있으면 그걸 최대한으로 사용해서 어떤 이익이라도 취해보려고 하는 부패사슬의 보편화도 이런 차원으로 보인다. 눈앞의 작은 이익이 달콤해서 그로 인한 명예의 실추나 위험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미래를 개척하고 사회를 아름답게 발전시키는 크고 의미 있는 일보다 자신의 주머니에 돈 백 불이 들어오는지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장학금을 주거나 어려운 이들을 구제할 때 그런 선한 일을 하도록 허락해주는 대가가 요구된다. 오늘 당장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했던 역사의 아픔으로 인한 이러한 삶의 방식과 생각은 몇 세대의 안정기가 지나야 사라지고 의미 있는 변화가 올 것 같다.

한 개인이나 조직의 미래를 보려면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를 보면 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인다. 생각이 사람을 망치기도 하고 성공으로 이끌기도 한다. 생각하는 바가 곧 그 사람이고 (잠23:7) 그 사회이다. 당신의 현재 모습은 과거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가의 결과이다. 10년 후의 모습은 현재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사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에 점쟁이가 아닌 자신에게 미래를 물어보아야 한다. 성공하는 사람에겐 성공의 생각이 있고 실패하는 사람에게는 실패의 생각이 있다. 그런데 어느 한 생각이 발전되고, 체계화되고, 동기 부여를 하고, 한 개인과 조직의 노력과 힘을 이끌어내고 방향을 제시하는 힘이 있다면 그것을 비전이라고 한다. 그렇다, 비전은 한 개인이나 집단이 나아갈 방향과 성취할 목표이다. 동기 부여와 노력을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자 방향성이다. 그러나 비전은 바른 기초 위에서 세워져야 한다. 마약, 술, 도박, 살인, 테러, 강간 등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생각을 비전으로 삼으면 안 된다. 은행을 털어 백만장자가 되겠다는 생각이 올바른 비전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베트남의 청년들과 성도들에게 미래를 향한 바른 비전을 갖도록 지도하고 격려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다.

바른 비전의 기초는 성경적 세계관이다. 존재의 근원을 묻는 질문이자 답이며, 이에 근거해서 세계를 보는 눈을 갖는 것이다. 온 우주의 기원과 우리가 누리는 생명은 어떻게 시작됐는가에 대한 바른 답을 제시하는 성경적 세계관 위에서 올바른 비전을 품어야 한다. 우주의 시작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관점과 해석들은 인간의 이성의 결과물이 아닌 하나님 말씀에서 출발해야 한다. 19세기가 믿음의 변화를 요구했고 20세기의 세계 대전들과 극단적인 좌우 이념의 대립 속에서 행동의 변화가 요구됐다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특히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창조주 하나님의 위격이 훼손된 21세기에는 성경적 세계관으로의 변화가 절실하다. 그리고 바른 비전을 세워주는 또 다른 토대는 인생관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과 답이 인생관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 나의 인생의 끝은 어디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자 답이다. 내 자신이 누구인지, 인생의 목적과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답도 하나님이 성경에 제시해 놓으셨다. 여기에 기초하지 않은 세속적 비전은 탐욕을 추구하는 것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토대는 올바른 가치관이다.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어떤 가치에 의해 움직일 것인가? 인생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이자 답이다. 이 가치관에 대한 분명하고 정의로운 답이 성경에 있음으로 그 위에서 비전이 세워져야 한다. 결국 성경적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위에서 바른 비전이 나오고, 그 비전이 한 사람과 조직과 국가와 인류를 움직이는 것이다. 비전은 성장 가능성이며 미래 가치이다. 비전은 한 개인, 기업, 국가의 미래 가치이자 성장 가능성이다. 그래서 한 개인이나 조직, 국가의 미래 가치와 성장 가능성은 그들이 품고 있는 비전에 달려 있다. 한 기업의 주식 가격이 미래 가치를 반영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어닝 서프라이즈를 발표했어도 미래의 사업 비전이 잘 보이지 않으면 주식 가격이 급락한다. 미래 가치와 성장 가능성이 미약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거는 보지 않는다. 한 개인의 성장 가능성, 미래 가치도 비전에 달려 있다. 그래서 과거가 있는 오빠는 용서할 수 있어도 비전이 없는 오빠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필자가 베트남 제자들에게 비전을 강조할 때 쓰는 말이다. 나를 버린 잘생긴 오빠가 비전이 없었다면 아쉬워 말라고 하면서 꿈과 비전을 강조해주었다. 비전은 오늘은 할 수 없는 것 같지만 미래 그 사람이 될 것과 미래의 그림을 놓고 오늘을 평가하는 것이다. 이 시대는 미래에 대한 꿈과 이상을 갖고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생각과 언어와 행동이 비전적이고 희망적일 때 용기를 얻고 의지하고 따르고 싶어 한다. 비전은 자유의 영과 바른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에서 나온다. 비전은 기쁨이며 사명이다. 그리고 선한 목표이다. 비전은 자신과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미래에 대한 비전을 품고 계획을 세우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베트남의 청년들에게 앞날을 설계하고 그 길을 걷도록 인도하는 일은 쉽지 않다. 목전의 작은 이익이 아닌 현실 너머의 세계를 보고 인내하며 묵묵히 걷게 하는 확실한 동인을 찾아주는 것이 선교사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이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어떻게 따를 것인지 생각하게 해야 한다. 다행히 많은 청년들이 견실한 믿음 속에서 목전의 일이 아닌 꿈을 따라 사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희망이 있으면 오늘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 지난 몇 년 간 이곳 청년들을 한국과 호주 등에 유학 보내고 있다. 어려움과 가난의 연속이지만 일하면서 열심히 공부한다. 자신의 미래 가치와 성장 가능성에 투자하는 것이다. 더 갖춰진 일꾼이 되고자 선진 학문을 공부하고 있지만 가난한 나라의 청년들에게는 학비 부담이 태산과도 같다. 그런데 호주와 한국의 청년들은 이미 좋은 교육 시스템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기회를 허비하는 걸 볼 수 있다. 각종 미디어 속의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이라는 사람들에 의해 국가와 사회의 권위와 시스템에 분노하고 도전하고 파괴적으로 대항하도록 부추김을 받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지식적 가치에 대한 진정한 각성이 있는 메시지인지 질문하고 점검해야 한다. 지성인은 지적 가치에 대한 깊은 각성과 그 가치를 나누고 선하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각종 미디어를 통한 잡다하고 영양가 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 휩쓸려 금쪽같이 귀한 청년의 시기를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 반면에 비전을 품고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청년들을 볼 때 대견하고 기쁘다. 어떤 생각으로 오늘을 산 사람이 10년 후에 더 좋은 미래를 맞이할까?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복과 자신의 미래 모습을 기대하면서 오늘을 살아가기 바란다.

안필립 목사
예수교 대한성결교회
베트남 선교사, 교회개척, 고아원
마약자 재활원 & 신학교 운영
2011년  –현재까지